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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곧 예술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어떤 인위적인 오브제도 생산하지 않고, 어떠한 미학적 쾌감을 유발하는 인공적인 사물도 전제하지 않은 채 삶 자체가 이미 예술인 어떤 지점을 가정해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해 여행과 수집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여행이란 삶 자체와 구별되며, 수집은 레디메이드와 구별됨으로써 예술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켜준다. 여행이란 미지의 영역 속에 내 의식을, 내 몸을 던져 넣는 일이며, 미처 예기치 못한 상황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일이며, 이로써 내 의식이, 내 몸이 깨어지게(깨어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수집은 자연물과 인공물을 취해서 그 의미기능을 전유하고 변용하는 일이다. 그것이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탈취해 이를 재배열하는 것, 곧 탈맥락과 재맥락을 실천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론(혹은 거창하게는) 세계를 재편하는 일에 복무하는 것이다. 이로써 겨우 예술이 되는 어떤 지점 곧 최소한의 예술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삶과의 차이를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의 존재의미를 강화하고 그 실천논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삶의 자장 속에서 예술의 논리를 실천하는 계기로 치자면 이처럼 나의 의식을 끊임없이 다른 삶의 지점으로 내보내는 일이나(여행을 하다보면 처음의 계획은 여지없이 수정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일들로 여행이 끝날 때가지 두근거리게 하고 설레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즉 끊임없이 나를 불안정 체제로 몰아간다), 결정화된 세계의 패턴을 허물어 재배열하는 일, 즉 여행과 수집만한 것도 없다.

 

정재철의 작업은 이런 여행과 수집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삶과 예술 간의 최소한의 차이를 견지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의 계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삶인가 하면 어느새 예술로 되돌려지고, 예술인가 하고 보면 불현듯 삶의 자장에 속해져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작업에 대해선 길 위의 예술이며, 여행의 기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여기서 여행의 기술은 스킬과 도쿠멘타 둘 다를 아우른다. 스킬은 여행으로 하여금 삶과 구별시켜주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어주고(여하한 경우에도 삶 자체가 예술이 되기 위해선 삶에 개입하게 해주는 구실과 그 구실이 만든 흔적이 수반되어져야 한다), 도쿠멘타는 그 조건이 전개되어지는 양상을 채집하고 기록하고 재구성(전시)하는 형태를 취한다.

 

정재철의 작업에서 이런 여행과 수집의 기술이나 그 계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들어서이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이나, 여행지에서 채집한 각종 잡다한 사물들, 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찍은 사진이나, 깨진 유리조각과 도자기 파편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오브제들을 무슨 자연사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재구성해 보여준 것이다. 일종의 의미 있는 오브제나 거칠게는 의미 있는 쓰레기들로 부를 만한 이 사물들은 유독 작가에게 강력한 의미작용을 불러일으킨 것들이란 점에서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즉 개별적인 층위에서 작용하는 기호와 통한다(참고로 푼크툼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기호를 뜻하는 스투디움과 구별된다). 그런가하면 작가가 여러 국가를 경유하면서 채집한 유리조각과 도자기 파편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일련의 오브제들은 유사 고고학이나 유사 박물학과 같은 인문학적 미메시스를 연상시키며, 상호영향사와 문화적 혼성(인도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채집한 도자기 파편이 하나로 붙어있는)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이 일련의 작업들과 전시들에서 파생된 생각들이 여행과 수집, 여행의 스킬과 도쿠멘타를 본격화하고 구체화하는 향후 작업의 단초를 제공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유독 작가에게 의미작용을 불러일으킨 깨진 유리조각처럼) 누군가에게는 한갓 쓰레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기호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의 인식과 함께, (이국에서 취해온 도자기 파편들을 복원한 오브제가 암시하듯) 그 이면에는 일종의 상호영향사와 그 결과로서의 문화적 혼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발상이다.

 

이 발상을 본격화한 것이 1,2차에 걸친 실크로드 프로젝트이다. 2004년에서 2005년에 걸쳐 진행된 1차 프로젝트는 한국,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을 경유하는 것이었으며, 2007년에서 2008년에 걸쳐 진행된 2차 프로젝트는 파키스탄, 이란, 터키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1,2차 프로젝트 사이에 그동안 일종의 사잇길 작업을 진행한 바 있는데, 이때 주로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1,2차 프로젝트를 완결지은 상태이며, 향후 로마를 경유해 런던까지를 아우르는 3차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에 있다.

그 대략을 보면, 국내에서 온갖 형태의 쓰다버린 플래카드를 수거하고 세탁하고 포장하여 경유지에 해당하는 각 국가별 촌락에 들러 이를 현지인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주로 6개월)이 지난 연후에 재차 현지를 방문해 현지인들이 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근간이다. 이때 플래카드는 내국인에게 일종의 의미(이를테면 일종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호)로서 다가오지만, 외국인에게 그것은 의미로서보다는 그저 알록달록하고 현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식적인 천으로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해서, 이를 소재로 하여 집을 꾸미기도 하고, 몸을 치장하기도 하고, 모자나 가방 그리고 베개 커버와 같은 각종 생활소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플래카드 본래의 의미기능이 변질되고 변환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로써 미술이 의미론(차이 나는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퍼트리는)과 소비학(의미기호가 이미지로 전유되고 변용되고 소비되는) 그리고 교류사(간섭과 매개와 수정의 과정을 동반한 상호영향사와 문화적 혼성)와 같은 여타의 사회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지층과 만나질 수 있는 접점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뉴실크로드 프로젝트로 명명된 제 2차 프로젝트는 그 주요 루트가 파키스탄(라호르, 모헨조다로, 쿠에타)으로부터 시작해 이란(밤, 쉬라즈, 이스파한, 테헤란, 마쿠)을 거쳐 터키(에르주름, 상리우르파, 괴뢰메, 앙카라, 이스탄불)를 경유하는 것으로서, 여러 면에서 1차 프로젝트에 비해 달라진(혹은 진척된) 점들이 눈에 띤다. 이를테면 처음에 작가는 단순히 현지인들에게 세탁된 플래카드를 전달하고 차후에 그 사용내용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이후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점차 상호소통하고 상호작용 하는 간섭의 계기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말하자면 이번 2차 프로젝트에서는 현지인과 함께 참여하고 협의해 오브제를 제작함으로써 소통의 밀도감을 강화하는 한편, 일종의 기본패턴을 따라 사전에 오브제를 제작한 연후에 이를 특정 지역에다 세팅하는 식의 방법을 취하는 등 간섭과 개입의 계기를 다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부제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경유하는 국가별 도시의 바자르(Bazaar, 일종의 야시장)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특징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로 대변되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혼성 현상을 살피기에 시장만한 것이 없고, 이는 플래카드가 가지고 있는 광고로서의 의미기능과도 무관하지 않다(비록 현지에서 그 의미기능이 한갓 이미지로 변질되긴 하지만). 주요 루트를 바자르로 설정한 만큼 그곳에서 현수막을 재활용할 수 있는 여지로는 주로 햇볕을 피하기 위한 각종 차양을 만드는 것에 집중된다. 이때 현지인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그 형식이 더 섬세해지는데, 이를테면 차양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일종의 장신구를 달아 장식적인 미감을 더한다.

이와 함께 설치하고자 하는 장소 여하에 따라서 오브제의 제작방법이나 그 설치양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점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도로변에 면해있는 노점에 차양을 설치해야 할 경우, 뒤편의 철제 울타리 구조물이 지지대로 변환되는 등 기왕의 구조물이 차양을 고정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의 지지대로 그 의미기능이 변질되는 것이다. 이는 크게 보아 기존의 풍경 속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 개입하고 침입하고 간섭해 결국에는 그 풍경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종의 도시문화생태학의 관점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생활의 편의를 위해 그때그때 만들어진 임시방편의 구조물이 기왕의 도시풍경에 덧대어져 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도시의 풍경이 변화되고, 궁극적으론 그 속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눈에 띠거나(변화된 풍경) 눈에 띠지 않는(변화된 의식) 상호영향사의 관점을, 그리고 그 실천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도시생태학과 함께, 일종의 상황주의미술의 실천논리마저 예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임시방편의 구조물이 도시의 구조를 부풀리고 변환시키는 것처럼) 사전에 정해진 형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으로 하여금 형식을 불러들이고 결정하게 한 것이다(이를 확대적용하면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사전에 정해진 형식이나 정의 같은 것은 없다).

 

아울러 실크로드 프로젝트 도큐멘테이션으로 명명된 일련의 부수 작업들에서 작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각종 사물들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낡은 액자 속에 넣어져 일정한 지시적 의미와 함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현지 기록사진들, 여행루트를 표시한 직접 제작한 지도와 기록물들, 폐 현수막을 재봉해 만든 옷, 그리고 각 국가를 경유할 때마다 새겨 받은 현지어로 된 여권 도장 등 일련의 사물들에서 미술과 일상과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더 애매해진다(미술의 경계는 애매할수록 좋고, 미술의 정의는 덜 단정적일 때 더 신뢰가 간다). 그 사물들은 일종의 증거물로서 현상하는데, 그 자체 억압의 지표(이를테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식의)로서보다는 상호관계성과 상호작용성의 지표, 의미론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연쇄들의 지표, 수평적 계열의 지표로서 다가온다.

이로써 정재철의 실트로드 프로젝트는 여행과 수집이, 여행의 스킬과 도쿠멘타가 미술(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행의 기술은 곧 삶의 기술이며 존재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공감을 자아낸다.

고충환 /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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